채식과 자연식물식

채식과 자연식물식

지난 9월 13일 미국의 유명한 영양학자 콜린 캠벨의 신작 『당신이 병드는 이유』가 출간됐다. 캠벨은 전작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 자연상태의 식물성식품으로 구성된 식단이 암, 심뇌혈관질환, 당뇨병, 비만, 각종 자가면역질환 및 염증성질환 등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수백 편의 연구논문들의 내용을 정리해 제시한 바 있었다. 하지만 캠벨은 『당신이 병드는 이유』에서나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나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식단을 표현할 때 채식(vegetarian)이나 순수채식(vegan)이 아닌 자연식물식(wholefoods, plant-based diet; WFPB die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물론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는 원서의 ‘plant-based diet’라는 표현을 채식으로 번역했지만, ‘vegan’과 ‘plant-based’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당신이 병드는 이유』를 번역하면서 ‘plant-based diet’를 ‘채식’이 아닌 ‘식물식’으로 번역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식물식’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채식,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채식은 먹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필자의 경우 건강을 위한 수단으로서 채식을 시작했지만, 철저하게 채식을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 환경파괴 및 지구온난화, 인류의 기아에 대한 책임감 등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채식은 ‘숭고한 가치’를 위한 일종의 ‘고행’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도덕적 ‘채식주의자’는 동물성식품을 먹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동물성식품을 먹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렇다보니 채식, 비건(순수채식) 혹은 생채식은 사람들을 유혹할 달콤하고 기름진 맛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달고 기름진 맛에 미각이 마비된 잡식인들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명한 비건 음식점들과 전문점에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한 번 먹어보고 다시는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식용유와 설탕을 너무 많이 사용해 먹고 나면 몸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맛있다고 소문난 곳일수록 더욱 그 정도가 심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환자들에게 ‘채식 전문점’ 혹은 ‘비건음식’을 권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의하라고 권한다. 채식 의사가 채식전문점을 피하라고 권고하다니 이 얼마나 심각한 역설인가!

 

| 식물성 식품만 먹는 것에 대한 오해

필자는 진료실에서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지방간, 비만, 자가면역질환, 건선, 만성피로, 비염, 수면무호흡증, 여드름, 속쓰림, 식도역류 등의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권고를 한다. “고기, 생선 및 어패류, 계란, 우유 및 유제품(치즈, 요구르트), 식용유(튀기거나 볶은 것), 설탕을 먹지 마세요. 말 그대로 밥에 채소반찬만 드시고, 간식으로는 과일은 드세요.” 아무리 이렇게 얘기를 해도 사람들은 그저 “고기 좀 덜 먹고, 채소를 많이 먹어라”는 일반적인 조언 정도로 흘려듣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중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좋아진 게 없네요”라고 불평을 한며, “이젠 제 방식대로 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치고 정말 제대로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고, 식용유를 먹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먹는 양을 조금 줄였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나 생선, 계란, 우유, 식용유, 설탕이 없는 음식은 상상도 못하는 것 같다. 결국 사람들은 이리저리 혼란을 겪으며 병원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데 ‘채식인’들도 이런 혼란에 빠져있기는 마찬가지다. ‘채식인’들은 잘못된 영양학의 ‘채식버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고기대신 콩고기(콩에서 단백질만 추출한 고도로 가공된 식품)를 먹고, 식물성 지방과 설탕이 주성분인 채식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웰빙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단백질이 부족할까봐 콩이나 두부, 두유를 과도하게 먹고, 생선기름 대신 오메가-3를 위해 들깨와 들기름, 아마씨, 치아씨 등을 챙겨 먹는다. 탄수화물 때문에 살이 찔 수 있으니 밥을 줄이고 견과류 섭취를 늘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웰빙 채식’을 해도 몸은 좋아지지 않는다.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여러 건강문제가 생기기 쉽다. 기존의 ‘채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 자연식물식

자연식물식(WFPB diet)이라는 용어는 콜린 캠벨이 1980년대 영양학자들과 식물성 식품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을 때 처음으로 사용됐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채식’은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채식과 식물식은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 채식은 주로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으면서 우유나 계란을 먹으면 채식, 우유와 계란도 먹지 않으면 비건 채식(순수채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식물식은 ‘~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식물성 식품만을 먹는 것을 뜻한다. 배타적인 느낌도 없고, 의미의 전달도 훨씬 분명하다. 그리고 ‘식물’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식물성 식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 자체로 건강한 식단의 내용을 강화한다. 보통 ‘자연식물식’은 동물성식품과 함께 가공된 식물성 식품 즉, 식물의 특정 성분만 추출한 식물성 고기(단백질), 설탕(당분), 과일주스(당분), 식용유(지방), 백미 및 백밀가루(전분) 등을 식단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환자들에게 채식을 하라고 말을 하려면 이런저런 단서를 장황하게 따로 설명해야만 한다. 채식을 하더라도 이런 저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자연식물식은 그 용어 자체가 건강한 채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이제 자연식물식을 할 때

『당신이 병드는 이유』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연식물식’이라는 용어를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저자인 콜린 캠벨의 의도를 100% 이해하고 동의한다. 미국에선 2005년 『무엇을 먹을 것인가』 출판 이후 ‘wholefoods plant-based’(자연식물식) 혹은 ‘plant-based’(식물식)이라는 용어가 ‘vegan’(순수채식, 비건)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미국 아마존에서 ‘plant-based’라는 단어로 검색을 하면 다양한 요리책들과 관련 서적들이 줄지어 나온다. 심지어 ‘A Plant-Based Life’라는 책도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정크푸드를 허용하는 채식을 대체할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필요하다. 필자는 ‘자연식물식’이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병드는 이유』에서 캠벨은 수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환경을 위해 헌신하면서, 자신의 몸은 쓰레기 음식으로 파괴하는 예를 들고 있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완고하게 채식 혹은 채식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필요하다. 아무리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을 배제하더라도 설탕과 식용유, 과도한 단백질을 먹으면 몸은 병들 수밖에 없다.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병들면 그 가치도 이 사회에서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다. 건강의 희생을 ‘고행’으로 감수할 필요는 절대 없다. 얼마든지 더 건강한 채식이 가능하다. ‘자연식물식’으로도 채식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똑같이 추구할 수 있다. 지날 달부터 채식 문화 매거진 월간 <비건begun>(www.begun.co.kr)에 기고하는 필자의 칼럼 제목을 ‘현미채식 처방전’에서 ‘자연식물식 처방전’으로 바꾼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동물과 환경,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자연식물식’을 할 때다.

 

추천도서: 『당신이 병드는 이유』 열린과학, 『무엇을 먹을 것인가』 열린과학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베지닥터 이사이자 사무국장이다. 현재 선병원 직업환경의학센터(대전 유성구 소재)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관련 서적으로는 공저 [채식이 답이다] , 감수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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